나는 학교를 빙 돌아 농구코트 뒤 쪽 울타리까지 갔다. 정말 그곳에는 규석이가 아이들과 웃으면서 농구를 하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에서 그 녀석 이름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한참을 받지 않는다. 아마도 벗은 자켓에 핸드폰이 있을 것이다. 왼쪽 귀엔 통화음이 오른쪽 귀엔 공이 튀는 소리가 텅텅 들린다. 잠시 후, 점심시간이 끝남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농구 경기가 끝이 났다. 규석은 자켓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이제 내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어, 전화했었네?”
“으응. 너랑 문 교수님 예전에 포럼 때문에 같이 미국 간 적 있었지? 그 때 일 자세히 기억나?”
“그 때 내가 일기를 써놓은 게 있을 거야. 그걸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그럼 오늘 중으로 내 메일로 좀 보내줄 수 있을까?”
“미안, 요즘 내가 좀 바빠서. 다음 주 중으로 보내줄게.”
전화를 끊고서도 나는 규석을 계속 쳐다봤다. 설마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설마 그럴 놈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 때 공을 가지고 뛰어가던 얘가 뒤돌아 말했다.
“근데 아저씨는 여기 왜 온 거에요? 일하러 안 가요?”
그러자 규석이 말했다.
“난 책을 쓰러왔어.”
뭐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평전은 내껀데. 내가 쓰기로 결정된 게 아니었나? 규석이 이 새끼 요즘 주식으로 손해 봐서 좀 궁하다더니. 돈 받기로 한 건 어떻게 안 거지? 아, 이 부장한테 들었나? 이 개새끼, 또 동네방네 떠벌리고 다녔겠지. 젠장.
당장이라도 달려가 규석에게 너 여기 왜 온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방금 아무것도 모른 양 전화했던 터라 그럴 수도 없었다. 한참을 생각했지만 답은 없었다. 규석이 떠나자 나는 모텔을 향해 걸었다.
모텔에 들어온 나는 양말도 벗지 않은 채 노트북을 꺼냈다. 일단 써야 한다. 나는 벌써 이만큼이나 썼다, 내가 투자한 시간이 얼만데라고 말하려면 글이 필요했다. 이곳에 내려온 지 겨우 이틀째다. 내일까지는 천천히 쉬면서 하자고 마음먹었는데 이젠 그럴 수 없다. 일단 어머님에게 들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했다. 손가락 열 개가 다급하게 키보드 위를 날아다녔다. 오타가 날 때마다 백스페이스를 신경질적으로 눌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정신이 든 나는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9시 15분. 갑자기 배가 고팠다. 하지만 글은 아직도 몇 페이지 되지 않았다.
간단히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다시 시작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사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얼마 만에 이렇게 글에 집중했던가. 물리학자의 꿈이 좌절된 나는 과학 기자라는 꿈을 꾸었다. 글을 잘 쓰는 사람 중에는 과학을 아는 사람이 적고, 과학을 아는 사람 중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적다. 내가 그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가 되고 싶었다. 내 글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어느새 나는 웃고 있었다.
또 다시 정신없이 쓰고 있을 때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모르는 번호다. 나는 받지 않았다. 그러나 전화는 계속 울려댔고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왜 사람들은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받기 싫어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걸까?
“여보세요.”
“박명길씨 핸드폰인가요? 저는 미동고등학교 동창회장 김열수라고 합니다. 내일 동창회일 관계로 학교에 전화 드렸는데 선생님께서 책 쓰는 문제로 왔었다고 하더라구요. 마침 내일 13기 동문 3반 동창회가 있습니다. 그... 문창범 교수님이 그 반이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도움이 될까해서 이렇게 전화 드렸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또 핸드폰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배터리가 없다는 표시가 떠 있다. 배터리가 어딨더라. 나는 가방을 열어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분명 출발하기 전 넣었던 아니 넣었다고 생각했던 배터리는 없었다. 하... 한숨이 나왔다. 이젠 손가락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몸이 무거워졌다. 마지막 남은 힘이 한숨에 섞여 나온 것 같았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머리도 몸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내일 이어서 하자며 노트북을 꺼버렸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사실 그냥 안 떴으면 좋겠지만.
약속 시간은 저녁 9시였다. 6시부터 시작인 모임은 동창회 회의가 끝나는 9시쯤 가기로 했다. 시계 초침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재떨이엔 담배 하나가 또 떨어진다. 아침부터 그야말로 미친 듯이 썼다. 어제 쓰다만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이야기를 보충한 후 나와 있었던 대학 시절 얘기를 줄줄 써내려 갔다. 나조차 신기할 정도로 글이 잘 써졌다. 좀 막혔다 싶어도 잠시 생각하다보면 실마리가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멈추고 싶지 않았지만 시계는 이미 8시를 지나고 있었다.
어제부터 씻지 않은데다가 수염까지 덥수룩하게 난 상태라 씻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옷을 챙겨 입고 어제 약속한 편의점 앞에 왔다. 이 편의점 앞에서 전화하면 바로 마중 나온다고 했다. 나는 핸드폰을 열었지만 액정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편의점에 들어가 물었다.
“핸드폰 충전하면 얼마나 걸리나요?”
“30분 정도 걸립니다.”
지금 8시 40분이다. 별 방법이 없었다. 전화를 해야 동창회에 갈 수 있다. 나는 충전을 부탁하고 편의점 테이블에 앉았다. 혹시 시간이 남을까 해서 인쇄해온 평전 초고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손님, 전화 왔는데요.”
지금 장소를 옮기려고 하니 어디쯤 왔다고 전화 속 사람은 물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가 왔다. 충전 중인 핸드폰을 받았으나 배터리는 3칸 중 2칸 밖에 차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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