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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평전 - 5회

일상 2010/05/24 23:19

나는 학교를 빙 돌아 농구코트 뒤 쪽 울타리까지 갔다. 정말 그곳에는 규석이가 아이들과 웃으면서 농구를 하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에서 그 녀석 이름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한참을 받지 않는다. 아마도 벗은 자켓에 핸드폰이 있을 것이다. 왼쪽 귀엔 통화음이 오른쪽 귀엔 공이 튀는 소리가 텅텅 들린다. 잠시 후, 점심시간이 끝남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농구 경기가 끝이 났다. 규석은 자켓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이제 내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어, 전화했었네?”

“으응. 너랑 문 교수님 예전에 포럼 때문에 같이 미국 간 적 있었지? 그 때 일 자세히 기억나?”

“그 때 내가 일기를 써놓은 게 있을 거야. 그걸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그럼 오늘 중으로 내 메일로 좀 보내줄 수 있을까?”

“미안, 요즘 내가 좀 바빠서. 다음 주 중으로 보내줄게.”

전화를 끊고서도 나는 규석을 계속 쳐다봤다. 설마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설마 그럴 놈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 때 공을 가지고 뛰어가던 얘가 뒤돌아 말했다.

“근데 아저씨는 여기 왜 온 거에요? 일하러 안 가요?”

그러자 규석이 말했다.

“난 책을 쓰러왔어.”

뭐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평전은 내껀데. 내가 쓰기로 결정된 게 아니었나? 규석이 이 새끼 요즘 주식으로 손해 봐서 좀 궁하다더니. 돈 받기로 한 건 어떻게 안 거지? 아, 이 부장한테 들었나? 이 개새끼, 또 동네방네 떠벌리고 다녔겠지. 젠장.

당장이라도 달려가 규석에게 너 여기 왜 온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방금 아무것도 모른 양 전화했던 터라 그럴 수도 없었다. 한참을 생각했지만 답은 없었다. 규석이 떠나자 나는 모텔을 향해 걸었다.

모텔에 들어온 나는 양말도 벗지 않은 채 노트북을 꺼냈다. 일단 써야 한다. 나는 벌써 이만큼이나 썼다, 내가 투자한 시간이 얼만데라고 말하려면 글이 필요했다. 이곳에 내려온 지 겨우 이틀째다. 내일까지는 천천히 쉬면서 하자고 마음먹었는데 이젠 그럴 수 없다. 일단 어머님에게 들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했다. 손가락 열 개가 다급하게 키보드 위를 날아다녔다. 오타가 날 때마다 백스페이스를 신경질적으로 눌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정신이 든 나는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9시 15분. 갑자기 배가 고팠다. 하지만 글은 아직도 몇 페이지 되지 않았다.

간단히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다시 시작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사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얼마 만에 이렇게 글에 집중했던가. 물리학자의 꿈이 좌절된 나는 과학 기자라는 꿈을 꾸었다. 글을 잘 쓰는 사람 중에는 과학을 아는 사람이 적고, 과학을 아는 사람 중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적다. 내가 그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가 되고 싶었다. 내 글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어느새 나는 웃고 있었다.

또 다시 정신없이 쓰고 있을 때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모르는 번호다. 나는 받지 않았다. 그러나 전화는 계속 울려댔고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왜 사람들은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받기 싫어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걸까?

“여보세요.”

“박명길씨 핸드폰인가요? 저는 미동고등학교 동창회장 김열수라고 합니다. 내일 동창회일 관계로 학교에 전화 드렸는데 선생님께서 책 쓰는 문제로 왔었다고 하더라구요. 마침 내일 13기 동문 3반 동창회가 있습니다. 그... 문창범 교수님이 그 반이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도움이 될까해서 이렇게 전화 드렸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또 핸드폰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배터리가 없다는 표시가 떠 있다. 배터리가 어딨더라. 나는 가방을 열어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분명 출발하기 전 넣었던 아니 넣었다고 생각했던 배터리는 없었다. 하... 한숨이 나왔다. 이젠 손가락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몸이 무거워졌다. 마지막 남은 힘이 한숨에 섞여 나온 것 같았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머리도 몸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내일 이어서 하자며 노트북을 꺼버렸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사실 그냥 안 떴으면 좋겠지만.

약속 시간은 저녁 9시였다. 6시부터 시작인 모임은 동창회 회의가 끝나는 9시쯤 가기로 했다. 시계 초침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재떨이엔 담배 하나가 또 떨어진다. 아침부터 그야말로 미친 듯이 썼다. 어제 쓰다만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이야기를 보충한 후 나와 있었던 대학 시절 얘기를 줄줄 써내려 갔다. 나조차 신기할 정도로 글이 잘 써졌다. 좀 막혔다 싶어도 잠시 생각하다보면 실마리가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멈추고 싶지 않았지만 시계는 이미 8시를 지나고 있었다.

어제부터 씻지 않은데다가 수염까지 덥수룩하게 난 상태라 씻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옷을 챙겨 입고 어제 약속한 편의점 앞에 왔다. 이 편의점 앞에서 전화하면 바로 마중 나온다고 했다. 나는 핸드폰을 열었지만 액정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편의점에 들어가 물었다.

“핸드폰 충전하면 얼마나 걸리나요?”

“30분 정도 걸립니다.”

지금 8시 40분이다. 별 방법이 없었다. 전화를 해야 동창회에 갈 수 있다. 나는 충전을 부탁하고 편의점 테이블에 앉았다. 혹시 시간이 남을까 해서 인쇄해온 평전 초고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손님, 전화 왔는데요.”

지금 장소를 옮기려고 하니 어디쯤 왔다고 전화 속 사람은 물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가 왔다. 충전 중인 핸드폰을 받았으나 배터리는 3칸 중 2칸 밖에 차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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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평전 - 4회

일상 2010/05/16 19:55

  생전 처음 보는 동네를 걷는 기분은 묘하다. 누군가에게 지겹기 짝이 없는 동네 슈퍼조차 나에겐 처음이라는 낯설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인가. 나는 길을 걸으며 방금 전 대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조금 이상한 생각도 했다.

“내가 어디가지 않으면 우리 집에서 계속 있어도 되는데……. 내가 하필 일이 생겨서. 우리 바깥양반하고 같이 있는 건 또 좀 그렇죠?”

“저도 좀 가 볼 데가 있으니까 괜찮습니다. 근데…….”

“네?”

“혹시 시를 좋아하십니까?”

  표정을 살짝 찡그리며 그녀가 말했다.

“아뇨, 전 시는 대체 왜 읽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러고 보니 창범이는 시를 좋아했어요. 근데 그건 왜요?”

“아닙니다. 혹시 좋아하시면 하나 선물해드리려고 했죠.”

“기왕이면 소설로 부탁할게요.”

  문 교수는 아무 생각 없이 시집에 사진을 넣었을 뿐일 것이다. 내가 너무 오버한다. 하긴 요즘 세상에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길가는 사람 붙들고 시를 좋아하시냐고 묻었을 때 그렇다는 답을 들을 확률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계속 걸었다. 잠시 후 미동 고등학교 간판이 보였다.

  평전에서 중요한 것은 문 교수가 노벨물리학상을 받기 전, 후의 이야기이지 어린 시절 이야기가 아니다. 굳이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찾아갈 필요는 없어 보인다. 어머님에게 들은 것과 학생기록부정도 보면 어린 시절에 들어갈 내용은 다 끝날 것 같다.

  얼마 만에 고등학교에 온 걸까? 나는 학교 건물까지 들어가는 경사진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고등학교다. 학교 건물에 들어가자 ‘학교를 빛낸 자랑스런 동문’ 에 문 교수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이름 밑에는 ‘1965 ~ ’ 라고 쓰여 있다. 이제 빈 곳에 2009라고 적어야겠지. 누군가 그 숫자를 이곳에 와서 직접 새겨 넣는 걸까? 아님 판을 통째로 뜯어서 작업장으로 가져가야 할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2009라고 새겨질 자리에 손가락을 대보았다. 예상보다 훨씬 차가움에 깜짝 놀라 손을 떼었다. 손가락 끝의 냉기가 팔목을 거쳐 팔꿈치로 오려다 사그라진다. 나는 옷에 손가락을 몇 번 문대고 교무실로 향했다.

“저, 여기 이상철 선생님이라고…….”

  좀 깐깐하게 생긴 여 선생이 귀찮은 듯이 손가락으로 한 남자를 가리킨다.

“안녕하세요. 저 문 교수님 일로 왔..”

“역시, 생활기록부가 필요하시죠? 잠깐만 여기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이 사람 생긴 것과는 다르게 눈치가 빠르다. 생활기록부를 찾으려 간 선생이 올 동안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돌아왔다.

“여기 있습니다. 보시죠.”

  역시 성적은 눈에 띄게 우수했다. 또 담임선생들의 코멘트도 하나같이 문 교수의 성품과 성적을 칭찬했다. 나는 수상 실적을 보았다. 이미 물리학에 재능을 보였는지 과학올림피아드에서 상도 받았다. 그런데 당연히 있을 것이라 생각한 3년 개근상이 없었다.

  내가 아는 문 교수는 교통사고가 나지 않는 이상 결석 같은 것을 할 사람이 아니다. 하물며 이렇게 가까운 거리의 학교라면 와서 누워있는 한이 있더라도 올 사람이다. 나는 출석부를 넘겨서 출결을 확인했다. 고2 9월 중순 쯤 무려 7일을 결석했다. 이상하다. 어제 어머님은 고등학교 때 딱히 아픈데 없이 건강했다고 했다. 아파서 일주일을 쉬었다면 기억에 남을 정도 일이 아닌가?

“고2 때 담임선생님은 누군가요?”

“어디 보자, 최호석 선생이네요. 이 분 돌아가신 양반인데.”

“이 때 문 교수님 가르치셨던 다른 선생님들은 지금 안 계시나요?”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많이들 정년 퇴임하셨어요. 다른 학교로 가신 분들도 있구요. 자기 반 학생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경우가 많은데 다른 반 애들 일을 기억하려나?”

그런가? 일단 나는 수첩에 ‘고2 때 결석 일주일’ 이라고 적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점심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뭘요, 또 필요한 게 있으면 전화 주세요. 언제 한 번 친구 분하고 밥 한 번 먹죠.”

  습관적으로 웃으며 문 쪽으로 걸어가려던 나는 멈춰서 물었다.

“친구 분이요?”

“방금 전에 와서 교수님에 대해서 물어보고 간 분이요. 생활기록부 안 보고 가셔서 친구 분이 대신 오신 거 아니에요? 그 키 크고 잘생긴 분인데.”

  나는 학교를 나와 화단 난간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나 말고 누가 와서 문 교수를 물어보고 간 걸까? 지역 신문사? 아니면 지역 방송국? 12시 45분. 이제 점심시간이 끝나간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다. 아침도 적게 먹었고 그 이후에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일단 뭘 좀 먹고 생각해 봐야겠다. 저쪽 농구코트에선 아이들이 농구를 하고 있다. 땀을 흘리며 열심히 뛰는 아이들을 보니 한층 더 허기가 진다. 점심은 뭘 먹을까. 순간, 공이 이쪽으로 굴러온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황급히 숨었다.

  규석이었다. 분명.

‘왜 저 녀석이 여기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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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평전 - 3회

일상 2010/04/26 18:09


  나는 부여역 앞 벤치에 앉아 일정을 검토했다. 혹시 이 수첩에 영화 제목이 있지 않을까해서 첫 장부터 한 장씩 넘겨봤지만 영화 제목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5일이다. 금요일엔 1시까지 출근하라고 했으니 정확히 5일은 아니다. 월, 화, 수, 목, 금이라고 한 글자씩 적는데 수첩에 물 한 방울이 톡, 하고 떨어졌다. 참 지독하다. 이제는 비까지 온다. 나는 편의점으로 달려가 우산과 담배 하나 그리고 바나나 우유 하나를 사서 나왔다. 비가 와서 그런지 오랜만에 꺼내 입은 외투에서 옷장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팔을 코 가까이에 대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런 거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바나나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차라리 따뜻한 캔 커피를 살 걸. 담배를 다 피운 뒤 나는 거리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머니를 다시 보니 장례식장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녀는 나를 웃으며 맞아주었지만 교수님 아버지는 나를 한 번 슥 보고는 다시 TV를 봤다. 신발을 조심스레 벗고 교수님이 쓰던 방으로 들어갔다. 노트북이 든 가방을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올리고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방은 전체적으로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고 책상에는 먼지 하나 없었다. 그래서 더 사람 사는 곳 같지 않았다. 빗물이 신발에 스며들어 발가락 쪽이 다 젖었다. 오자마자 양말을 벗고 발을 씻기가 좀 그래서 새 양말로 갈아 신었다.


  식탁 위에 음식이 비워지고 어느새 커피잔이 내 앞에 놓였다. 얼마나 나이를 먹어야 잘 모르는 사람과의 저녁식사가 익숙해지는 걸까? 그나마 아버님이 수저를 놓자마자 TV 앞으로 가버려서 다행이었다. 이제 질문을 시작할 시간이다.

“교수님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 했나요?”

“공부만 하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제일 흥미 있는 것이었다고 해야겠죠. 책 읽는 걸 너무 좋아했어요. 앞집에 사는 대학 교수 집에서 책을 자주 빌려봤어요. 나중에 그 교수가 그러는데 창범이는 보고 싶은 게 너무 많은지 책장 앞에서 한참을 고민한대요. 그러다가 꼭 한 권만 골라서 간대요. 집에 와서는 방바닥이든 식탁이든 그거 펴들고 계속 보는 거예요. 책을 보면서 젓가락질을 하니까 반찬을 안 집고 입에 젓가락만 넣고 씹기도 하고.”

  그녀는 오랜만의 아들 이야기에 조금씩 얼굴이 환해졌다. 꼬맹이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이 집에서 줄곧 자라왔다고 했다. 커피가 점점 미지근해졌다.

“교수님 여자 친구는 없었나요?”

  그녀는 잠시 커피잔을 바라보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고등학교 때 부턴 집에 들어와도 별로 말을 안 해서. 그 시기엔 대부분 그렇잖아요.”

  하긴. 웬일인지 남자들은 그 시기를 전후해서 집에서 무척 말이 없어진다. 그들은 집과 학교에서 종종 다른 사람처럼 행동한다.

“교수님 고등학교 때 사진 같은 건 없나요?”

“있어요. 잠시만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잠깐 수첩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아버님이 컵에 물을 따르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눈을 휙 돌렸다.

  사진 속의 문 교수는 꽤 괜찮았다. 공부도 잘하는 나름 핸섬한 남자아이로 보였다. 사진을 보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현관 쪽에서 소리가 났다.

“여보, 운동 가?”

  꽝하고 문이 닫혔다.

“저, 아버님이 기분이 안 좋으신 거 같은데…….”

“사실 창범이가 그렇게 된 후에 창범이 얘기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미안해요.”

  좀 더 이야기를 해봤지만 교수님은 학창 시절에 공부를 유난히 잘했던 것 이외에 그렇게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문 교수의 어릴 적 일화 몇 개를 더 듣고 커피잔을 싱크대에 넣었다.

  오늘 밤은 이곳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어머님은 “창범이는 누가 자기 방에 들어오는 거 무척 싫어했어요. 근데, 이젠 뭐…….” 하고 뒤 끝을 흐렸다. 방문이 닫히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벌렁 누웠다. 천장 위에 전등만이 별 생각 없이 환했다. 돈도 좋지만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스포츠신문 인턴도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이제 또 자소서를 써야 한다. 토익 기한이 다 되기 전에 취업할 수 있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전등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코로 들어오는 공기와 배의 오르락 내림만 느낄 수 있었다. 잠에 들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다.

  나는 다리를 크게 올렸다 내리며 몸을 일으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바로 정면에 보이는 것은 책장이었다. 책장 역시 그다웠다. 책장 칸마다 책 크기에 따라 구별을 해 놓았다. 그래서 책들이 서로 키재기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들쭉날쭉 마음대로 책들이 들어차있고, 그 위 공간엔 종이들이 뒤엉켜 들어가 있는 내 방 책장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나는 일어나 책장 앞에 섰다. 물리 교과서가 꽂혀 있었다. 그것을 뽑아 천천히 넘겨보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물리가 참 재미있었는데 어느새 물리는 나에게서 너무 멀어진 단어가 됐다. 물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정말 무지하게 많지만 잘하는 사람도 찾아보면 꽤나 많다. 그리고 그 중 몇몇을 세상은 천재라고 부른다. 물리학자의 생애란 수많은 천재들이 쌓아올린 탑을 이 악물고 기어 올라가 그 위에 벽돌 한 장 놓고 삶을 마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 때 나는 힘껏 탑을 오르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계단을 밟던 어느 순간 나는 알았다. 나는 천재도 뛰어나지도 않다는 것을 말이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일치하는 행운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며 밑줄 쳐진 공식들을 중얼거렸다. 아직은 낯설지 않았다. 다 읽은 마지막 페이지가 천천히 덮였다.

“어! 이거.”


  내 생일날 교수님이 선물로 준 ‘언젠가는’ 이라는 시집이다. 나는 그 조그만 시집을 꺼내 펼친다. 그런데 펴자마자 사진 하나가 바닥에 떨어진다. 사진 속 웃고 있는 여자는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의 손을 잡고 있다. 배경은 흐리지만 그곳은 아마도 바다인 것 같다. 웬일인지 여자를 어디서 본 듯하다. 나는 뚫어지게 그 여자를 바라본다. 어디서 본 사람 같은데. 여자가 잡고 있는 손은 누구의 것일까? 교수님? 이 늦은 시간에 그것을 알려줄 사람은 없었다. 나는 사진을 가방 속 아무 노트나 꺼내 끼워 넣고 시집을 원래 자리에 반듯하게 넣었다. 이제 슬슬 졸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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